주보람

Joo Bo Ram

내가 믿어 왔던 관념이나 생각이 되려 큰 틀이나 짐이 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상적인 자아를 쫓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완벽을 추구하다 시작만 반복하게 되기도 하고, 언어와 필연적 세계관에 갇혀 발 아래의 씨앗을 보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 무거워서 결국 틀이 되어버리는 관념들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완벽, 이상, 영원, 처음, 1등... 뭔가 사회에서 특별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관념일수록 그 관념 자체를 추구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작업은 이런 틀이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제가 찾아낸 방법은 무의미해 보이는 작은 행위의 반복이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약간의 실수와 우연으로 생기는 오차는 이런 질서를 추구하면서도 질서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저의 미약한 몸부림입니다. 하지만 이런 작지만 의미 있는 저항이 끊임없이 반복됐을 때 결국엔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은 시작, 중간, 끝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저는 완벽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것만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더 나은 것을 위해 끊임없이 지금을 연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작을 반복하면서도 지금에 머무를 수 있는 작업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업이 0+0+0+0+0+0+0+0+0+0+0+0+0+0+0+0+0+0+0+0+0+0=1이었습니다. 끝없이 젯소를 덧칠하며 시작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려 애쓰는 이 작업은 어느새 시계바늘처럼 돌아가고 평면도 입체도 아닌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게 어떤 것이 되어버리는 상태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Perfect 시리즈는 관념적인 완벽함이라는 게 얼마나 쓸모 없고 덧없는지를 빗대어서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한 쌍의 캔버스에 형상을 반복해서 그려나갑니다. 동그라미를 그린 뒤, 그 옆에 똑같은 동그라미를, 똑같은 동그라미 옆에 다시 똑같은 동그라미를 반복해서 그려나갑니다. 컴퓨터와 달리 완벽하지 않은 몸의 반복적인 수행과 약간의 우연이 처음의 모양과 점점 어긋나게 만듭니다. 하나는 형상의 경계에서 출발하여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는 형상의 경계에서 출발해서 밖으로 나옵니다. 완벽을 추구한다는 점이 같더라도 완벽의 방향에 따라 그것이 틀이 될 수도 앞으로 더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Right mountain는 캔버스 위에서부터 아래로 직선을 그어 내려간 작업입니다. 처음으로 선으로 채운 면이 아닌 나머지 부분에 눈길이 간 작업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둘 다 우연에 의해 결정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비슷해 보였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의도치 않게 두 그림의 경계가 정확히 이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틀로부터 강렬하게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오히려 더 틀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이런 끊임없이 틀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틀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이 지금 저의 상태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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