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만약 피가 씻기고 물과 섞여 묽어진다면, (콘노 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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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막상 창밖을 쳐다보고, 겨울이라 생각 못 하고 창밖으로 나아가 몸으로 겨울을 느낀다. 그렇게 겨울은 내게 촉각적이고 경험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겨울은 안으로 향하는 계절이다. 눈이 세상을 덮어버리고 외투를 켜켜이 입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서 한 해를 되돌아본다. 그런데도 내가 밖에 나와 있다. 추운 바람을 맞으면서 걸어가다가 문득, 손 거스러미를 발견했다. 계속 신경이 쓰여 살짝 손으로 뜯으려니 피가 흐른다. 심각한 정도가 아니지만, 물로 씻어 닦는다. 이제 어느 정도 됐다. 피는 이제 흐르지 않고 멀쩡해 보인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물은 피를 씻는다’라는 말은 어떤 정화 혹은 치유처럼 들리는 한편, 피가 흐르게 된 원인과 사태의 결과 둘 다 은폐하는 말로도 들린다. 그런데 이 둘은 공통적으로 물을 도구로 여기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물이 담긴 욕조에서 몸에서 피가 흘러내린다면, 물은 피를 씻을 수 없고 묽게 또 묽게 퍼진다. 말하자면 씻기 위해서 물을 다룰 때 비로소 우리는 피를 씻을 수 있다. 그렇다면 피는 어디서 나는가? 사실 다양한 작업이 선보여지는 졸업 전시에 주제를 가지고 오기도 어렵고 어쩌면 보는 사람이 개별 작업을 주제에 종속시켜버릴 우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졸업 전시의 주제는 피를 씻어내리기 위한 물처럼 종종 기능한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미세한 변수도 아예 고려되지 않고 매끈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졸업 전시는 실제로 더욱 다양한 매체에 걸쳐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진 작업들이 소개된다.

그런데도 리뷰 역시 모든 작업을 하나씩 거론하기 힘들고 어떤 특징을 포착하고 늘 작성된다. 이번 졸업 전시의 주제 ‘물은 피를 씻는다’를 매끈하게 다루지 않되, 그럼도 개별작업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려면 다른 꼭지를 가져올 필요가 있다. 피가 나온 원인이 다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결과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온 게 피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졸업작품 역시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런데도 창작의 동기와 최종 결과물은 각기 다르기에 작품은 하나의 공통적인 주제로 완벽하게 수렴될 순 없다. 리뷰를 작성하는 데에 있어 필자는 제목을 ‘수단’으로 여겨 작품 분석에 적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피가 수분이라는 이유로 피와 물의 관계가 모호해지는 것과 같은 태도도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단단하고 명확한 키워드이다.

이번 졸업 전시의 특징을 꼽아보자면 ‘뼈’라는 키워드가 적절하다. 여기서 말하는 뼈란 작품의 모티프, 즉 표현대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뼈는 자라는 대상, 살이 제거된 죽음의 지표, 내용을 튼튼하게 보여주는 지지체와 같은 물리적 바탕이나 소재/모티프로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이 키워드를 통해서 각각 작품의 특징과 핵심적인 부분 즉 ‘뼈대’를 밖으로 끄집어본다면 어떻게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뼈라는 키워드가 가장 뚜렷하게 등장하는 작품은 바로 서명범의 회화작업이다. 여기서 뼈는 재현대상으로 그려지는데, 공통적으로 라 붙여진 작업 중에서 십자가를 그린 작업에서 뼈의 의미는 더 심화한다. 바로 육체가 사라진 예수의 정신적인 지표로 기록된 십자가는 단단한 것과 믿음을 결합한다. 거기에는 육신도 뼈도 남지 않지만 교차된 나무막대가, 그와 그에 대한 신앙심을 기록하는 뼈대가 있다. 그런데도 (전 맥락에서 말하는 십자가와 같은) 기록물은 어떤 경우에 변질하는데, 이승일의 영상 작업 <미라클 프라자>(2019)는 이 지점을 보여준다. 해를 거듭하면서 새로 세워지는 성당이 어느새 미세한 요소들이 변하면서 완벽하게 계승되지 않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상에 등장하는 성당은 굳건하게 비춰지고 있다. 믿음의 굳건함은 건축물을 받쳐주는 뼈대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확고하고 단단한 추상적 개념처럼 자리한다. 박주영의 영상 작업 (2019)에서 다뤄지는 할머니의 집 또한 (화자의 내면이 반영된 자막에 나오듯) “흐릿한 잔상”임에도 영상에는 등장하는 3D 모델링뿐만 아니라 막을 수 없는 기억이 확고함으로 비춰진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에 나오는 3D 모델링 인물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없음)과 달리,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흐릿한 잔상에서 보호하려는 인물의 모습이다.

견고한 이미지, 바로 단단한 형상을 기록한 결과물과 신앙과 기억처럼 추상적이지만 단단한 개념이 교차하는 키워드인 뼈는, 한편으로는 육체(감)와 함께 움직인다. 예를 들어 김무영의 영상 작업 <애뉴얼 어니스티 1>(2019)에 등장하는 몸의 동작은 흑백의 반전으로 생기와 생기 없음 사이를 반복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누운 모습을 발바닥 방향에서 찍은 장면이나 서로 꽉 안아주는 장면은 영상의 흑과 백이 주는 효과에 머물지 않고 포착하는 샷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안아주는 장면은 색상이나 샷의 각도와 구도라는 기술적 태도에서 나온 효과에 머물지 않고 살아있는 자와 생기 없는 존재가 만나는 지점인 도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만남은 김규상의 오브제 <팔랑거리기 위한 지지체>(2019)에서 지지체에 움직이는 장치를 부여하여 생기를 불어넣는다. 제목만 봐도 <팔랑거리기 위한 생명체>(2019)와 쌍으로 묶일 수도 있는 이 작업은 ‘팔랑거림’을 통해서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대상에 각기 다른 성격을 부여한다. 미니멀하게 구성된 ‘지지체’는 오브제를 보여주는 것과 다른 용도로 전시장에 소개되고, ‘생명체’는 그것 즉 작품이 사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전제를 다시 상기시킨다. 어쩌면 앙상한 뼈처럼 보이는 <팔랑거리기 위한 지지체>는 사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뼈대 역할’을 통해 지지체의 수단적인 성격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이 뼈대 역할은 (졸업 전시에 소개된) 한가윤의 페인팅에서 이미지의 살과 함께 보여진다. 지지체의 물질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깊이감의 화면이 아니라 앞뒷면으로 침투한다. 이런 통합 아닌 배치의 감각은 손효정의 페인팅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오려내어 덧붙여지고 증식한다. 이런 특징은 한가윤의 페인팅과 다른 각도로 뼈라는 키워드를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법칙을 거스르려는 빗방울들을 숨겨주는 공간들>(2019)에서 등장하는 기하학적 입체는 입시 미술에서 기본으로 가르쳐주는 형태 모사를 비틀어놓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단순하고 딱딱한 인상을 주는 기하학 형태는 근본을 다져 가며 육성하는 미술의 교육적 뼈대를 다시금 왜곡적으로 보여준 결과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증식과 이식은 정화연의 작업에도 포착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의 작업은 샤워실의 복합적인 성격을 오브제 작업과 영상으로 연결시켜 보여준다. 영상 작업 <욕실>(2019)에 등장하는 오브제는 어둠 속에서 마치 심해탐사에서 발견된 선박의 잔해나 고래의 뼈처럼 보인다. 전시장에 실제로 놓인 오브제 작업은 세련된 느낌에 대치되는, 그런데도 인간의 육체성과 다른 생물과 같은 인상을 가져다 준다. <기울어진 뼈>(2019)나 <반짝이는 뼈>(2019)에 사용된 호스나 스펀지와 같은 사물들은 어떤 하나의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총합으로 나타난다. 이 총합은 그가 말하려는 욕실의 이질성, 바로 깨끗이 씻기 위한 공간과 욕실의 청결성 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그러기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지지체에 대한 관심보다 그의 오브제 작업은 어떤 결합과 총합의 형태에 뼈라는 단어를 갖고 오면서, 씻어내릴 수 없는 불결함뿐만 아니라 이를 제거하려는 청결성까지 이질적으로 결합한 모습을 보여준다.

뼈에 대한 유사 관계나 주제 혹은 모티브가 아닌, 은유의 태도는 어떤 경우에 작품을 통해 내부와 외부를 뒤집는다. 즉 뼈가 겉이 되고 겉이 뼈가 되는 전환 관계에서 이택우와 권도율의 작업은 기계장치의 외부에서 안으로 향하는 시점을 반영한다. 이택우의 사진 작업 (2017)에서 기계 내부를 포착하는 시점은 권도율의 전시장 벽면에 걸린 이미지가 그렇듯이 회로를 들여다보는 시점과 연결된다. 그런데 막상 그들의 작업은 혈액순환이나 신체 리듬까지 시각화하는 것보다 X-Ray 촬영처럼 가만히 남는 대상을 향한다. (2019)을 비롯한 권도율의 오브제에서 전달되는 깜찍함은 원래 기능에서 시각적으로 향유되는 매력으로 남는 것들이다. 즉 분리되고 전시되는 (어떤 전체에서 나온 것과 같은) 부분들은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는 뼈대 역할에서 ‘외견적으로’ 묘한 매력을 각인시키는 대상으로 변화한다.

뼈대 역할과 작품 사이의 관계는 이번 졸업 전시에서 소개된 일련의 퍼포먼스에 가장 잘 드러난다. 필자는 일정상 실제로 퍼포먼스를 관람하지 못하고 동영상 링크를 통해서 현장의 분위기와 함께 작품을 감상하였다. 실제로 전시 공간에 들어갔을 때,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작가의 경우는 퍼포먼스의 이전 기록과 함께 작품에 등장하여 사용되는 대상들을 공간에 배치하였었다. 장영해와 장다은, 그리고 추승민은 각각 전시장에 퍼포먼스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관람자에게 보여줬다. 막상 가만히 전시된 대상들을 보면 그것들이 과연 어떻게 퍼포먼스 작업에서 작동되고 또 쓰였는지 짐작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우리는 퍼포먼스에서 어떤 기능이나 쓸모를 그 대상들에 찾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장영해의 공간에서 등장한 유리문 한쪽은 퍼포먼스 <모든 의심이 먼지처럼 그대로네요 (clime, front hook, angel, invert, daphne, figure head, scorpion, fall, gemini, princess, chopstick)>에서 열고 닫는 문이나 칸막이로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퍼포머와 ‘함께’ ‘작품을’ 작동시키는 요소로서 유리문은 퍼포먼스에 등장한다.

피가 씻기고 물과 섞여 묽어진다면 여기에는 확실히, 그런데도 남는 어떤 것이 있다. 이번 리뷰 형식으로 필자는 ‘뼈’라는 키워드를 중심적으로 끌고 가면서 작품을 다시 하나하나 살펴봤다. 필자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 키워드를 가지고 왔지만, 각자의 작품을 좀 더 면밀하게 갈고 닦기 위해 작가들 또한 어떤 개념적인 틀이나 형식화된 패턴에서 가지를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졸업 전시는 (종종 유머로 소비되는 것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무대”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졸업 전시를 보아 온 입장에서, 모르고 있다가 다시 그때 작업과 작가를 알게 되는 일이 개인적으로도 많았고, 직접적인 교류로 이어지기도 했다. 졸업 전시는 ‘졸업’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리고 앞서 말한 ‘유머’로 소비되듯이 어떤 완결성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졸업 전시가 좋고 나빴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여기서는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 다른 결과로 이어져 또 맺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런 의미에서 가지를 뻗을 수 있게, 이어 붙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