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미술은 미래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유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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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미래’를 끌어오거나 아련하게 가리키는 전시가 유독 많았다. 지난 몇 년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납작함(flat)’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제 ‘미래’를 불러오게 된 것은 희망적인 전환일까. 대의를 향한 희미한 줄기라도 붙들었던 과거로부터 그 흔한 마니페스토 하나 없이 결별했지만, 의외로 단호했던 그 단절 때문에 막연한 대안조차 ‘휘발성’이라는 말로 수식할 수밖에 없었던 국면, 위계 없는 타임라인의 등장과 더불어 포스트모던이 예외가 아니라 규범이 되어 건조하게 나부끼는 이미지와 낱말들, 지도 앱을 탑재한 스마트 디바이스가 가능하게 한 ‘유닛’ 시점의 근거리 탐험,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은 물론 후자의 전자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기대하는 것이 무의미해져 버린 1인 미디어의 환경과 평등하게 리얼한 자본주의의 현 단계까지 (누군가 서울-플랫이라 요약하려 시도한 것들). 현재의 조건들을 융통하던 젊음이 유언을 채 남기기도 전에 죽음보다 괴로운 시시함, 시들함 같은 것들에 시달리다 미래의 추격을 마주한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딱히 아쉽거나 괴롭지 않은 것은 ‘플랫’은 특정한 시간대에 한정되기보다 연속적인 부정의 조건, 즉 좀처럼 바뀌지 않을 ‘기반-없음’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플랫은 소실되지 않는다. 그저 미끈한 그것 위에 무언가가 올라설 뿐이다. 그러니 플랫 바로 위의 지층이 미래라는 사실은 어쩌면 (내가/네가/우리가/너희가/그들이) 끌어온 소진되지 않은 잠재태들이 채 단단하게 굳지 못한 기반 위에 서게 될 것을 예견한다.
납작한 것은 무해하나 끈적이는 것은 곱게 넘어가지 않는다. 어쩌다 일구어낸 납작한 것들?출신과 배경에 갇히지 말고 동료를 찾자, 유연하게 협업하고 성장하자, 허황된 성취보다 각자에게 의미 있는 것을 찾아보자?에 꽤 못생긴 것들?대표적으로 ‘제도화’되었다는 혐의-이 달라붙는다. 그래서인지 작년과 올해 미술대학의 졸업 전시를 보는 일이 유난히 힘겨웠다. 긴장된 분위기를 공유하며 각자의 최선을 던지기보다 어쩐지 힘을 남겨두는 태도, 왜인지 모를 안전함. “우리는 서로의 미래를 서로가 가져다 쓰고, 모르는 이에게 미래를 되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해 우리는 계속해야 한다. 영문을 모른 채로 계속하기로 한다”는 말에서 ‘우리’와 ‘서로’는 각각 누구이며, ‘미래’와 ‘계속’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미래와 완료시제의 접합은 일종의 수사적 장치로 이해하여 유보하더라도 ‘우리’에 대한 질문은 명료하게 남는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이하 우미사)》는 무척이나 도발적인 이야기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해왔다고 고백, 혹은 선언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미사》가 상정하는 시간대는 대체로 인간들의 것, 그중에서도 ‘우리’로 규명된 특정 세대나 집단의 것으로 그려진다. 대체로 직전의 과거와 직후의 미래를 연장해다 서로 맞붙인 것을 보면서 그렇다고 짐작해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다 먼 미래가 거의 확실하게 줄 수 있는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극한의 두려움이나 극단적인 낙관을 불러오는 ‘미래는 알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자원으로 쓰기보다 현재와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시점을 움켜잡고 거의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근미래를 바라본다. 또한, 전혀 다른 스케일, 즉 개체가 아닌 종 단위로 사태를 파악해보는 일도 보기 쉽지 않다. 근과거와 근미래 사이를 왕복하는 서울-리듬은 의외로 라운지에서 진행된 ‘미래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잘 볼 수 있다. 대체로 ‘미래는 없다’고 자조하거나(‘내가 미래다’와 같은 주제 의식도 역설적으로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좀처럼 요약되지 않는 아무 말들로 양분된다. 아무래도 미래가 도대체 어떤 속성의 자원인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맵핑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로 현시점과 밀착된 반응들이 쏟아져 나온다. 미래를 말하지만 거의 필연적으로 과거로 밀려들어 가 있는 현재에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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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여러 생각들이 한데 엮여서 서울의 SF 미술이 가능할까, 하는 근본 없는 질문에 골몰한 적이 있었다. 사유와 시각장의 최전선에 서서 그다음에 올 세상을 제시하고자 하는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불가지의 미래 자체를 양분 삼는 SF 미술. SF 문학과 영화는 이미 미래를 충분히 융통해왔다. 시간과 함께 다변화되고 축적된 서사의 짜임과 시각적 효과는 미술이 스스로의 영역을 확보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풍부하다.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유용하고 살가운 친구가 될 것인지 궁극적으로 인류의 파괴에 기여할 적이 될 것인지 가늠하고, 시공간에 대한 전혀 다른 전제들을 제시하고, 이異종에 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는 등 SF 문학과 영화는 어렴풋하게 보이지만 결코 선명하게 알 수는 없는 미래를 담보 잡아 사고의 여러 우회로를 구축했다. 그런데 미술이 미래를 쥐어들 때는 여전히, 아니 작업마다 넘어야 할 난관이 많다.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도 탐색과 시도를 거듭하는 중인 점을 생각한다면 《우미사》는 용감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전시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러모아 미술이 미래를 자원으로 쓰거나 스스로를 미래로 밀어 넣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단편적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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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네틱 장치들이나 3D 그래픽 프로그램을 비롯한 소프트웨어를 동원하는 작업들이 우선 눈길을 끈다. 특히 이러한 도구들이 영상 매체로 통일되기보다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매체와 접목되거나 저마다의 균형감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갑다. 하지만 이내 미술은 결국 기술이 아니라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하게 된다. 물론 이때 기술과 매체는 배타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상태를 일컫는 것에 가깝다.
가령 김보원이 꾸려놓은 ‘가상 세계’는 3D 프로그램 내에서 차원과 공간의 깊이, 그리고 부피가 생성되는 무중력의 공간 자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을 회화, 영상, VR 영상 등의 작업으로 마주하고자 한다. 가상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가 형태를 갖추고 존재하게 되는 일을 꺼내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보았지만 작업 내에서 두 가지 축이 화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VR 프로그램에서 탄생한 ‘ㅂ’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포궁”, “내벽”, “가랑이”, “피”, “손톱” 등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파츠들을 나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지극히 인간적인(=형이상학적) 인식을 내비친다?“객체”, “상상”, “나”, “무한”과 “유한”.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작업에 동원된 소프트웨어 등의 툴은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기보다 다소 튜토리얼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송출하여 그 자체로 주제가 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다루고자 하는 바, 혹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매체를 통해 적절히 담겨 있는지, 혹은 서로 어긋나게 접붙이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의 문제. 특히 미술 매체로 사용된 지 얼마 안 된 도구를 사용할 때, 그러니까 이미 규정된 합의에 기대거나 이를 밀어낼 수 없을 때, 작업의 내재적인 구조가 매체를 직접 보증해야 한다. 사용하는 툴이 매체로서 어떤 특징을 가지며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작업을 통해 증명해 보이는 (때로는 부당하고 지나치게 과중한) 몫이 고스란히 남는다. 미술에 대한 진부한 질문?이야기와 매체가 맞물리는가?에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을 때, 더욱이 끌어오는 기술이 ‘신’기술이라 말하기 어려운 종류일 때 역설적으로 작업은 다소 억지스러운 ‘미술스러움’, 즉 작업 자체가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학습을 발동한다. (반대로 우아하게 구현된 기술은 오히려 ‘예술 같다’는 인상을 준다.) 매체가 되지 못한 기술이 도입된 작업은 자신이 미술이라는 점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게 마련이다. 혹여 도입된 기술이 진입 장벽이 높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 널리 상용화된 것?가령 SNS를 비롯한 미디어나 플랫폼?이라면 더욱 주의를 요하게 된다. 자칫 누구나 익히 보던 것이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제시될 때,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문제의식의 생애주기가 지나치게 짧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민은 관객의 동선에 반응하는 키네틱 조각을 제시한다. 조도를 낮추고 각 조각 간의 간격을 조정하여 꾸려낸 장면은 꽤 극적이다. 재료나 스케일이 주는 이질감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무대 위에 올려진 것 같이 그사이를 지나가는 신체를 밀어내는 진동이 있다. 물론 세 차례 방문했을 때 작업이 대체로 움직이지 않거나 작동하는 조각이 매번 달라서 어디까지가 계산된 실패인지 알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조각 자체의 움직임이 관객에게 일으키는 긴장감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벽면에 부착되어 있던 코딩 언어와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진행한 렉쳐 퍼포먼스 <예술가 기술을 만나다>는 다시 짚어보게 된다. 월텍스트의 간단한 C 언어의 명령어들은 대략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자원과 현실적인 한계를 명시하는데, 작업의 다른 요소들과 더불어 밀도를 올리는 데 기여하기보다 ‘프로그래밍을 했다 혹은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한다. 다른 한편, 렉쳐 퍼포먼스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동시대의 기술적 성취를 다루는데, 퍼포머들이 스스로 민망해하는 모습이 거듭 드러난다. 인스타그램 라이브가 하나의 매체일 수 있다면, 그 대표적인 특성은 현장성 혹은 휘발성, 그리고 실시간 소통일 텐데 동시 시청자가 거의 없는 라이브 영상이 전시장에 반복 재생되는 방식은 조각 자체의 퍼포먼스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작동하도록 설계된 것인지 질문하게 된다.
특정한 툴을 도입하지 않지만 각종 미디어나 인터넷, 3D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보는 이미지의 어떤 특성과 감각을 다룬다고 명시한 작업들도 다수 있다. ‘우리’는 지난 몇 년을, 그리고 앞으로도 수년간 이 문제에 골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플랫폼이 제공하는 이미지와 ‘우리’의 인식의 속도 차이를 언급하는 순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노스탈지아 같은 것이 내려앉는다. 처리해야 하는 시각적 정보가 급격하게 늘어난 과도기적 세대가 괴로운 과제를 떠맡은 사이에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는 의외로 천천히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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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SF 물에서 갑자기 다가와 버린 미래, 가령 외계 생명체의 침공이라든지 지구 생태계의 대대적인 파괴와 같은 파국은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문화유산을 최대치로 끌어다 쓰도록 떠밀곤 한다. 미래를 도모한다는 것은 한 켠에 수북이 쌓여있는 과거의 성취에서 무엇을 어떻게 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에 가까울 수도 있다. 미래의 단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당위가 은은히 서려 있는 졸업 전시?이것이 바로 다음 세대의 미술이다! ?에서 자신이 빚지고 있는 무언가를 의식하고,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태도에 특히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꺼내 쓰기로 한 과거의 양식 사이의 오차 범위를 얼마나 좁히느냐가 그다음 스텝의 정확도를 예견하기도 한다.
《우미사》에서는 여러 매체를 동시에 사용하되 ‘설치’ 장르의 문법을 참조하여 이를 통합하는 사례를 여럿 볼 수 있었다. 사용하는 매체에 대한 강박이 없다는 긍정적인 시그널로 읽힌다. 그사이에서 전통적인 매체나 역사적인 문제의식을 연장하여 이어가는 태도를 만나게 되면 의외로 반갑다. 가령 이정빈의 경우, 조각과 회화의 관계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의식하면서 얇은 종이로 만든 조각을 그린다. 가벼운 재료로 캔버스로 옮겨올 형상을 만들고 관찰하는 일은 분명 새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납작한 종이를 가볍게 접어서 손쉬운 깊이감을 부여하고, 그것이 회화로 옮겨온 결과물이 물감의 두께나 깊이의 표현이 무색하게 얇아 보이는 점이나 초점에 따라 그려진 형상의 무게가 달라 보이는 점은 인상적이다. 김도이의 동판화에도 특히 눈이 갔는데, 동판화 특유의 질감을 활용해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에 능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2016년 작업부터 근작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고전적인 매체인 동판화,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통 있는 장르인 풍경화를 어떻게 가상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데 끌어올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한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특유의 번진 듯하지만 세밀한 선표현이나 빛바랜 색은 설정된 시점?코난 도일의 『바스커빌의 개』의 괴담이나 인간이 부재한 환경에서 자생하는 상상의 생명체들의 시간대?을 완료시제로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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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기 위한 여행과 떠나기 위한 여행, 당도한 현실에 대한 고발을 하기 위해 미래를 끌어오는 서사와 폐쇄적인 세계관을 구축하여 땅으로 내려오지 않으려는 서사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고 당장 판단하기 어렵듯이, 《우미사》가 결국 ‘희망찬’ 미래를 그려내느냐의 여부는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 이동보다는 공간 이동에 더 집중하는 듯한 작업들이 긍정적인 전망이 확정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희망을 언뜻 보여준다. 이주연의 영상 <골든 위크>(구성하는 푸티지와 도판은 꽤 선명하고 몰입감 있다. 도쿄의 친구가 고미야시키(쓰레기더미에 가까운 호더의 방)를 청소하면서 집어 드는 물건들과 이를 버리거나 닦아내거나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가볍게 따져보는 행위는 1인칭 시점의 카메라로 침착하게 그려진다. 역겨울 수 있는 흔적과 잔재 그 자체보다 이를 하나씩 꺼내 보이는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이 행동 사이에 박물관에 방문하여 해양 생물의 모형을 구경하거나 명확히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삽화들이 끼어든다. 명시적으로는 장소의 이동이나 낯섦이 지배적이지만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각 사물들에 축적된 시간과 이를 포 뜨는 행동이다. 사물들을 만지고 옮긴 인물들은 덜어내고 떼어 낸 시간의 지층들은 등장 인물에게 과도한 무게로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간직한다. 서로 친근한 인물들이 밤길을 걷는 장면은 정직하게 즐거워 보인다.
최윤정의 은 이길 수 없는 게임에 던져졌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여전히 낙관할 수 있는 틈을 발휘한다. 성북동의 한 건물 앞에서 아르바이트생처럼 몇몇 인물이 안을 들여다보며 이 카페가 팔렸는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계단에 나란히 서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주변의 거리를 걷거나 아동용 자동차 장난감을 타거나 건물 앞에서 레몬을 꽉 쥐어 보인다. 이러한 행동들은 각각이 상징적이라기보다 일상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철거가 예정된 마을에서 이들이 도모하는 일은 빠르게 다가오는 미래의 상실을 지연하거나 미리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건물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마을이 아직 그곳에 있으니 함께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카메라를 든 이와도 친근한 듯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거나 오히려 서슴없이 카메라를 똑바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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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전시준비위원회는 전시 서문을 ‘서른 네 명이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선생들에게 발송했고 답장을 받아 도록에 실었다. 답장에서 선생들은 제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도 하고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졸업 전시는 대체로 애정으로 보호받기 때문에 외부인의 입장에서 그 온도를 제일 먼저 감지하게 된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무엇을 기대했고 어떤 것은 포기했는지 등 작업 뒤의 얼굴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미래라는 단어가 일종의 방아쇠가 되어 전시의 의도로부터 탈선하여 SF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지만, 사실 SF는 수없이 많은 태도들을 아우른다. 《우미사》는 전지구적인 위기의 상황이나 급격한 환경 및 시스템의 변경을 설정하되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순응하거나 의심하거나 무모하게 정의롭거나 갈팡질팡 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정밀한 하오징팡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그중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해 황폐해진 지구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술책으로 달과 지구를 연결하는 나노 다리에 공진을 일으킨다는「현의 노래」는 특히 뜨겁다. 인상적인 것은 ‘강철족’의통치에 비해 지극히 미약해보이는 인간들의 제스처?산에 올라가 합주하기?는 사실 정교하게 설계된 공격이었고, 결국 성공하고 만다는 점이다. 성공적인 동시에 ‘시적인’ 어떤 행동, 주어진 자원을 철저히 파악하고 여러 변수를 검토한 끝에 도출된 어떤 아름다운 것. SF 미술이 그런 것이 되기를 도모해볼 수 있을까? 막연하게 갖고 있던 생각들을 더 밀고 나갈 수 있도록 해준 《우미사》에 심심한 고마움을 전하며 ‘앞으로’를 기대해본다.